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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사

로마의 지중해 확장 시기

by 법과일상 2023. 1. 16.

이탈리아 중앙부에서 일어난 로마는 기원전 3~2세기에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고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사이에는 대서양 연안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팍스 로마나를 구현합니다. 기원전 27년에 제정 체제를 구축한 로마제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노예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라티푼디움 체제를 반전시키며 강력한 국가 국력을 다지는 한편, 발달한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한 위에다 웅대한 토목건축술과 라틴어 문학, 뛰어난 로마법 등 다방면에서 로마 고유의 문화를 반전시켜 유럽 세계의 주춧돌을 놓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전성기 시절과 관련한 사실들을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로마의 지중해 확장

카이사르는 (기원전 102년 ~ 기원전 44년)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 저술가입니다. 시저는 카이사르를 영어식으로 읽은 말 입니다. 제1차 3두정치에 가담한 후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에 원정, 그곳을 지배하면서 군비를 축적했습니다. 크라수스 사후에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원정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왕위에 앉혔습니다. 기원전 46년 딕타토르(독재관)가 되어 독재정치를 행했습니다. 속주의 징세 청부인 폐지, 무산 시민의 신식민시 건설 장려, 율리우스력 제정 등을 단행했으나 전제정치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아 브루투스 등의 공화주의자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제1차 3두정치는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기원전 60년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취임,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가담하여 세 사람에 의한 국정 독점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서 전사한 뒤 폼페이우스는 갈리아에서 세력을 쌓은 카이사르를 두려워하여 원로원과 손을 잡아 맹약이 깨어지게 됩니다.

 

갈리아 원정은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알프스 산맥 너머 대서양과 라인강에 이르는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속주로 삼은 원정을 말합니다. 피정복민인 켈트인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라틴문화가 보급되었습니다.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최고사령관이라는 뜻으로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폼페이수르를 쓰러뜨리고 귀국한 후 기원전 45년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았습니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도 기원전 40년에 이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화황제들은 이 칭호를 사용한 이가 적었습니다. 영어 emperor(황제)의 어원입니다.

 

로마 군단병
로마 군단병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63년 ~ 기원후 14년) 로마의 정치가입니다. 카이사르의 양자로 카이사르 사후 그의 군대를 이어받아 집정관에 취임합니다. 기원전 43년 제2차 3두정치에 가담한 후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지배자가 되어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구구스투수(존엄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자칭 프린켑스(제1시민)라면서 공화정을 존중하는 것처럼 행세했으나 사실상은 황제정을 확립하였고 로마의 황금기(팍스 로마나)를 열었습니다.

 

팍스로마나는 옥타비아누스 황제에서부터 5현제 시대까지의 200년간의 평화로운 시대를 말합니다. 제국에 안정이 찾아왔으며 로마 문화가 각지에 침투했습니다. 교통망이 정비되어 경제 활동도 활발해지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계절풍의 발견으로 인도와의 교역이 특히 활기를 띠었습니다.

 

 

 

포에니전쟁은 (기원전 264년~ 기원전 146년)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싸움입니다. 로마인이 페니키아인을 포에니라 부른 데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1차 포에니전쟁은 로마군이 시칠리아섬을 확보하면서 끝이 났고, 2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한니발 군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 본토를 유린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로마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 결국 대 스키피오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을 격파하고 히스파니아를 합병하면서 종료, 3차 포에니전쟁은 소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 카르타고를 완전히 쳐부수고 로마가 지중해 전역의 패권을 차지하면서 끝이 납니다.

 

라티푼디움은 대토지 소유제도를 말합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이 로마가 획득한 정복지를 점유한 뒤에 차츰 이를 사유화 하면서 정착한 제도로 본디는 넓은 땅, 즉 대농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피정복민을 농업 노예로 삼아 혹사시키면서 올리브, 포도 등의 과수 재배와 목축을 행했습니다. 로마 전성기 시절 풍요로웠던 로마 경제의 근간이 되었으나 기원후 2세기 경부터 노예 인구가 감소하고 노예 경영의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경영 부진으로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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